통합, 화합의 기치는 자칫 현실의 함정을 망각케 하는 아편
자기도취적 환상을 조장하고 맞대응의 순발력을 약화시켜
국민개헌은 대통령 4년 중임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당선 전후를 막론하고, 줄곧 통합, 화합, 공존 등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 “대통령은 갈라진 국민을 하나로 묶는 통합의 최고 (직)책”, “특정 지역이나 집단만을 대표해서는 안 된다”, “증오와 혐오가 아니라 공존을 지향하는 정치”, “갈등과 분열을 넘어선 ‘국민 통합’을 반드시 이뤄내겠다” 등이 그러하다.(창업일보, 5.22.)
여기에 ‘통합’ 개념이 자초하는 역설이 있다. 이재명의 호언과 달리, 대통령은 애초에 갈라진 국민을 하나로 묶기 위해 만들어진 직책이 아니다. 국민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가 있나? 그런 개념 자체가 독선이며, 대통령 직책의 임무를 잘못 과대평가한 것이다. 대통령은 견제와 균형을 원칙으로 하는 삼권분립의 민주정체에서 한 축을 담당하는 직책일 뿐이다.
갈등과 분열이 반드시 ‘통합’에 의해 극복되는 것도 아니다. 갈등과 분열은, 수직적 권력구조의 통합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의 공존을 인정, 양해함으로써 극복되는 것이다. 이재명이 한편에 ‘공존을 지향하는 정치’, 다른 한편에 ‘통합’을 말하는 것은 모순의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다. 통합이란 자칫 공존을 위협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존은 통합이 아니라 연합을 지향한다. 한 예로, 유럽은 단일체를 구성하고 있으나, 유럽 ‘통합’이 아니라 유럽 ‘연합(Union)’이라 한다. 연합은 구성원 각각이 자발적 의사에 의해 참가 여부를 결정한다. 반면, 통합은 강요, 강제에 의한 것, 탈퇴도 자유롭지 못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유럽연합의 일원이었던 영국이 자국민의 결정으로 연합을 탈퇴한 것은 자발적인 것이고,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일체가 언제나 통합의 원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실례가 된다.
통합과 연합의 차이를 새길 필요가 있겠다. 지역 균형 발전 관련하여, 이재명은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이라는 ‘쌍방파괴’ 구조를 지양하고, 지방 메가시티(거대도시) 구상과 재정 지원 차등화” 등 대의를 내걸었다.
그런데 ‘지방 메가시티 구상’에서 이미 통합과 연합 간 갈등이 불거졌다. 경남도지사였던 민주당 소속 김경수가 ‘부울경’ 연합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하여, 이미 다소간 입법의 기초가 마련되는 단계까지 진척된 바 있었다. 그런데 김경수가 중도 사퇴한 다음, 후임 도지사로 들어선 국힘당 박완수가 ‘부울경 통합’을 제시하며, 전임자의 ‘연합’ 구상을 뒤엎어버렸다.
부울경의 경우 연합과 통합의 차이는 그 권력구조에 있다. ‘연합’은 수평적으로, 부산, 울산, 경남이 각기 자체 결정권을 가지면서, 사안에 따라 협조 여부와 정도를 선택, 결정하는 원칙에 따른 것이나, ‘통합’은 결정의 권한을 일원화하고, 수직적 상명하복의 구조를 지향하는 것이다. 박완수의 ‘통합’ 기획은 부울경 의견의 차이로 성사되지 못했다.
부울경뿐 아니라, 대구시장이었던 홍준표는 대구-경북 통합을 시도했고, 전주시장은 전주-완주 통합을 시도했다. 전자의 경우, 안동 지역 시의회에서 지역민 여론을 들어보겠다고 하자, 홍준표가 그럴 양이면 통합하지 않겠다고 지레 판을 엎어버렸고, 후자의 경우는 완주 지역민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전시-충남도 통합의 화두도 경제권 확대냐 밀실행정이냐를 두고 이견이 분분하다. ‘통합’의 목표는 대전-충남 총인구 약 357만 명·GRDP(지역내 총생산) 전국 3위·수출 전국 2위 규모의 광역경제권의 형성에 있다고 한다.(내포뉴스, 202.8.19.) 문제는 경제권 확대를 당근으로 하는 통합이 밀실 행정의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인데, 이는 통합의 권력집중에 따른 부득이한 폐해이다.
‘메가시티’라는 낯선 외래어를 앞세운 이 같은 지역 ‘통합’의 기획은 작년(2024) 8월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초광역권 전략인 ‘5극(초광역권: 수도권, 충청권 메가시티, 대구 경북 통합, 부울경 동남권, 광주전남 호남권) 3특(특별자치도: 강원도, 전라북도, 제주도)’의 일환이다. 권력집중과 독재를 지향한 윤석열은 행정권력 집중의 일환으로 각 자치구를 획일적으로 ‘통합’하려는 야심찬 기획을 시작했다. 지역 ‘통합’은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지방을 통제할 수 있는 통로로서의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이재명 정부가 내건 “지방 메가시티 구상”이 이 같은 윤석열식 ‘통합’과 닮은 점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지방 메가시티 구상과 재정 지원 차등화”라는 등식이 그같은 의혹을 가중시킨다. 재정지원을 차등화하는 주체는 중앙정부이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가 ‘지방 메가시티’라고 하는 겉멋든 용어를 동원하고, 재정지원을 차등화하겠다는 것은 통합이 없으면 재정지원을 줄이겠다는 일종의 협박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지방분권을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지방 메가시티 구상과 재정 지원 차등화” 운운하는 것은 서로 모순된 것이다. 경제적 확대를 위한 지방 단일화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획일적, 강제적 권력구조의 ‘통합’이 아니라, ‘연합’이 되어야 한다. ‘연합’은 각 자치구의 결정권을 유보한 채, 필요한 경우 서로 협조하는 것이다. 경제적 이득, 혹은 중앙 재정 지원을 구하기 위해, 지역 자치단체의 결정권까지 중앙 권력에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통합’의 논리에 굴복하는 것은 돈에 팔려 쓸개를 파는 짓에 다름 아니다.
사족(蛇足)으로, ‘거대도시’라고 하면 되는 것을 왜 구태어 ‘메가시티’라고 하는 지도 알 수가 없다. 윤석열은 미국 지향적이라, 미국 가서 ‘아메리칸 파이’를 불렀던 이라고 하니, 그런 용어를 끌어대도 부득이 양해할 수 있는 지는 모르겠으나, 현 이재명 정부가 그 윤석열 정부를 따라 ‘메가시티’ 운운 하는 것은 좀 납득하기 어렵다. 이곳이 미국도 아니고, 한국 민초들이 죄다 영어에 통달한 것도 아니고, 영어를 공식 언어로 하는 식민지도 아니다. 미 대통령 트럼프가 ‘메가(큰)’를 좋아해서, ‘마가(큰 아메리카, 위대한 아메리카)’를 외친다고, 그 외국어를, 그것도 정부의 공식 정책 구상 발표에서 그대로 따라 떠드는 것은, 필자가 보기에,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구기는 망신살이다.
‘노란봉투법’이 23일 국회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있다. 노조법 2조(2호: 사용자 범위를 원청까지 넓힘, 5호: 쟁의 대상에 ‘사업상 결정’까지 포함) 등을 개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반발하여 국내 6대 경제단체 등이 국회를 찾아 결의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재계(기업)는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실용적 시장주의’를 강조했으나, 민주당이 추진하는 노란봉투법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민주당은 노사 중립의 원칙으로 돌아가 재계의 합리적 요구를 경청하라” 등의 요구를 냈다고 한다.
이 사례는 이재명이 내건 실용주의가 구체적 내용에서 해석도 같지 않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처한 입장에 따라, 동상이몽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결국 어떤 내용을 실용주의에 담을 것인가 하는 점은 결정의 주체가 이재명 정부인가, 그 반대편에 있는 ‘재계(기업)’인가 하는 데 달린 문제이다.
지금은 사회적 약자에 연민하는 이재명 정부이므로, 재계의 그 같은 주장이 다 관철될 일은 없겠으나, 정부가 바뀌어 약자의 입장을 상대적으로 덜 고려하는 정권이 들어서게 될 경우, 약자의 국민 민중은 속수무책이 된다. 그런 경우에 대비하여, 정부의 결정에 다수 국민이 제동을 걸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하겠다. 이재명의 선의만 마냥 믿고 있을 수만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재명이 내건 ‘통합’의 기치는 권력구조적으로 윤석열이 피력한 ‘통합’과 닮은 점이 있다. 윤석열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국민통합위원회(2023.10.17.)를 열고, “국민 통합이라는 것은 자유와 연대 정신에 기반해서 헌법 규범이라는 가치를 기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통합”, “‘수십 년 관료 생활을 한 내가 더 전문가니까 외부에서 가타부타 안 해도 내가 다 안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국민통합을 하기 어렵다”, “위원회의 다양한 정책 제언들을 우리 당과 내각에서 좀 관심 있게,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들, 또 자기가 담당한 분야들에 대해서는 꼼꼼하게 한번 읽어주시기를 당부드린다”, “국민통합위원회와 당정과 저 역시도 우리 국민들이 우리 헌법과 우리 제도를 사랑할 수 있도록 그 어떠한 어려움도 함께하겠다” 등 발언을 했다.
같은 자리에서, 이해선(윤석열 정부 2기 국민통합위원회 기획분과위원장)은 “국민통합위원회도 국민들과 함께 국민의힘과 함께 원더 피플 코리아(대단한 민중의 한국)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이상민(행정안전부 장관)은 “간사 부처로서 위원님들이 만들어주신 정책과 제언을 현장에서 잘 집행하겠다”고, 유인촌(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국민들에게 진심이 전해질 수 있도록 전국을 다니며 국민통합위원회의 마음을 전달하겠다”고 했다.(조선일보, 2023.10.17.)
윤석열이 “‘수십 년 관료 생활을 한 내가 더 전문가니까 외부에서 가타부타 안 해도 내가 다 안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국민통합을 하기 어렵다”, “당과 내각에서 관심을 가지고 읽어봐달라”고 한 것은 국민 통합의 주체가 윤석열 및 ‘당과 내각(행정부 장관)’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국민은 통합의 주체가 아니고, ’국민통합위원회‘가 전하는 진심을 듣기만 하는 존재이다. 윤석열은 이런 것이 “자유와 연대 정신에 기반해서 헌법 규범이라는 가치를 기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통합”인 것으로 해석했다.
윤석열의 사전에는, 국민이 생략되었을 뿐 아니라, 애초에 ‘당과 내각’도 윤석열이 알아서 다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다 안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국민통합을 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발언하지 않는 정치체제는 민주정이 아니라, 일인정 혹은 소수정이다. 민주는 민(민중)이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중심에서 발언과 결정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인이나 소수에 의한 통합은 강제이며, 거기에 자유나 자발적 연대는 있을 수가 없게 된다. 윤석열은 일인정치, 소수정치를 헌법정신인 것으로 왜곡하고, 짐짓 민주인 것으로 참칭했다.
이 같은 참칭은 이재명 정부에서도 진행중이다. 사실은 국민주권이 아닌데, 이재명이 하는 모든 결정이 마치 국민주권인양 참칭하는 것이 그러하다. 내용상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말은 할 수가 있으나, 권력구조적으로 결정권의 유무를 기준으로 본다면, 지금 정부는 국민주권 정부가 아니다.
더구나 치열하게 독재정부에 맞서 촛불을 든 시민들에게 이재명은 통합과 화해를 주문한다. 그러나 이재명이 외친다고 해서, 현실이 그대로 따라주는 것은 아니다. 통합, 화합의 기치는 자짓 현실의 함정을 망각케 하는 아편이며, 자기도취적 환상을 조장하고 맞대응의 순발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통합, 화합이 아니라 자유를 위한 저항이 일상화되어야 하겠다. 이는 이미 우리가 촛불혁명을 통해 터득한 것이다. 촛불혁명은 이재명 정부 입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든 정부 권력에 대한 상시적 항거를 뜻한다.
이재명 정부는 국민주권을 말하면서, 정부에서 국민을 대신하여 결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권력구조적으로 국민의 결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재명이 ‘국민개헌’이 이루어지도록 국회에 주문했다고 한다. 국회에서 국민을 위한 개헌을 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국민개헌은 국회나 대통령이 주체가 되어 객체인 국민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을 위한다는 허울을 쓰고, 국민을 통보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국민을 ‘하수’로 두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윤석열의 기조를 닮았다.
국민개헌은 국민이 개헌 논의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 개현을 통해 국민이 최종의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의 행정부, 입법의 국회, 사법 권력, 나아가 국회에서 만든 헌법 위에 국민의 발안에 의한 국민의 결정, 국민투표 등이 이번 개헌에서 이루어져야 하겠다. 국민개헌은 대통령 4년 중임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